문익점, 목화 보급으로 백성의 의생활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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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산청에서 자란 학자
문익점은 고려(918~1392)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외교관으로, 본명은 문익첨(文益瞻)이었으며 뒤에 익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이고, 본관은 강성(江城)이다. 남평 문씨에서 갈라진 강성 문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가장 유력한 출생일은 1329년 2월 8일이지만, 1328년 또는 1331년 출생설도 전한다. 사망 시점 역시 조선실록에는 1398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증손 문치창의 기록에는 70세까지 살다가 1400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1398년 6월 13일에 생을 마친 것으로 전한다.
그는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에 해당하는 경상도 강성현에서 문숙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극구 사양한 인물이었다. 문익점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12세 무렵부터 당대 학자 이곡의 문하에 들어가 이곡의 아들 이색 등과 함께 공부했다. 1338년 학당에 입학하고 1341년부터 이곡에게 학문을 배웠다는 연보가 전하며, 1350년에는 시경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던 경덕재에 들어간 뒤 이름을 익점으로 바꾸었다. 이곡의 문인이자 이색·정몽주와 학문적 인연을 공유한 그의 이력은 훗날 문익점의 공적이 성리학 초기 인물들의 활동과 함께 평가되는 배경이 되었다.
1346년 주씨 부인과 혼인했고, 1348년 장남 중용, 1350년 둘째 아들 중성을 두었다. 1353년에는 정동성향시에 이색과 함께 급제했으며, 1360년 11월 신경동당시에서 정몽주와 함께 문과 7품에 급제했다. 이후 정8품 김해부 사록을 시작으로 관료의 길에 들어섰고, 1361년 종7품 순유박사, 1362년 정6품 승봉랑을 거쳐 1363년 사간원 좌정언이 되었다. 주씨 부인은 그가 문과에 급제한 1360년에 세상을 떠났다. 지방 행정 실무와 학문 교육, 왕에게 의견을 올리는 언관의 직무를 차례로 경험한 그는 고려 조정의 문신으로 성장해 갔다.
원나라 사행과 정치적 격랑
1363년 좌정언으로 재직하던 문익점은 계품사인 문하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선발되어 원나라로 향했다. 서장관은 사행 과정의 문서와 기록을 담당하는 관원이었다. 당시 고려의 공민왕은 원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고, 원나라에 있던 고려인 최유는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워 공민왕을 몰아내려 했다. 문익점이 연경에 도착했을 때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했고, 최유는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이 군대는 1364년 1월 최영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 패했다.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를 받아 강제로 귀국하고 관직도 박탈당한 것으로 서술된다. 다만 그가 억울하게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반란의 주모자인 최유가 문익점의 뜻과 무관하게 그의 이름을 반란군 명단에 올렸다는 해석이다. 연보에는 1363년 11월 문익점이 운남행성으로 유배되었고, 1366년 유배가 끝난 뒤 원나라 대도로 돌아와 예부시랑과 어사대부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사행 이후의 구체적인 경위에는 서로 다른 전승이 있지만, 원나라에서 겪은 정치적 사건으로 그의 관직 생활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점은 공통된다.
이 격랑 속에서 문익점의 이름을 한국 생활사에 남긴 일이 시작되었다. 그는 원나라에서 목화씨 몇 알을 고려로 들여왔다. 연보에는 1367년 2월 목화씨를 붓두껍 속에 숨겨 개경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같은 해 정3품 중현대부 예문관제학 겸 지제교에 올랐다가 휴직을 청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목화 재배를 시작했으며, 1368년에는 예문관제학 겸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그의 주요 거주지는 수도 개경이었지만, 목화를 실제로 시험하고 증식한 중심지는 고향 산청이었다.
한 송이에서 시작된 목화 보급
목화씨를 가져오는 일만으로 새로운 직물이 곧바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문익점과 장인 정천익은 산청에서 씨앗을 심었지만 재배법을 알지 못해 대부분 실패했다. 문익점이 심은 씨앗에서는 성과를 얻지 못했고,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단 하나에서 꽃이 피었다. 두 사람은 그 한 송이로부터 100여 개의 씨앗을 얻어 다시 심었다. 문익점은 해마다 재배량을 늘렸고, 약 3년에 걸친 노력 끝에 목화 재배에 성공했다. 1367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무료로 나누어 주고 직접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며 재배 방법을 교육했다.
재배 성공 뒤에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었다. 수확한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솜으로 실을 뽑는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료에는 당시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호승에게 방법을 물어 씨아와 물레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전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천익이 홍원 등에게 목화씨를 빼는 씨아, 곧 취자차와 실을 뽑는 기계인 조사차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 왔고, 문익점이 이를 정천익에게 배워 시중에 보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익점은 단순히 식물을 재배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목화솜에서 실을 뜨는 방법까지 연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씨앗의 증식, 씨아를 이용한 씨 제거, 물레를 통한 실 잣기, 직조를 거쳐 마침내 무명옷과 솜이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목화가 널리 퍼지면서 일반 백성의 의복 재료는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어 갔다. 이전에는 주로 왕족과 권문세족 같은 지배층이 입고 덮던 솜옷과 솜이불도 시중으로 확산되었다. 문익점의 손자 문래와 문영은 이후 실 잣는 기구를 개량했다. 그 기구를 문래의 이름을 따서 ‘문래’라고 부르다가 말이 변해 ‘물레’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고려사》는 문익점이 한반도에 면포를 만드는 목화씨를 처음 들여왔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최근 백제 시대 면직물이 발견되면서 삼국시대에도 목화가 재배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SOURCE에는 중국 남량에서 546년 무렵 백제에 목화가 보급되었을 가능성과, 백제 말기인 628년 무렵 종자가 사라져 고려 말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도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문익점의 업적은 한반도 최초 전래라기보다 오랫동안 부족하거나 끊겼던 목화 종자를 고려 말에 다시 보급한 일로 해석될 수 있다. 그의 반입과 재배 과정은 훗날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관료의 소신과 고려에 대한 절의
문익점의 삶은 목화 보급에만 머물지 않았다. 1369년 부친상을 당하자 주자가례에 따라 3년 동안 묘를 지켰고, 1373년에는 이색의 추천으로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조정에 나가지 못했다. 1374년에는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가 되었다. 그는 정몽주·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처벌하라고 상소했다가 친원 성향 권문세족의 반격을 받아 청도군수로 좌천되었다. 우왕 즉위 뒤 중앙 정계로 돌아왔고,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1375년 전의감주부에 임명되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1376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왜구가 침입했지만 홀로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며 시묘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러한 효행으로 1383년 이성계의 추천을 받아 효자비가 세워졌다. 1388년에는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가 되었고,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문신으로서 1389년 왕 앞에서 강론하기도 했다. 그의 관직은 마침내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을 책임지는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 말 토지 제도를 둘러싼 갈등은 그의 정치 인생을 다시 흔들었다. 이성계·정도전·조준 세력은 사전, 곧 개인이 권리를 행사하던 토지를 혁파하는 전제개혁을 추진했고, 이색·우현보 등은 이에 반대했다. 문익점은 이준 등이 사전을 다시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상소할 때 병을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후 이색·이림·우현보 등과 뜻을 같이해 전제개혁에 반대했다. 그는 사헌부 대사헌 조준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가 1390년 8월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복귀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당시 정치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론 8조를 올렸으나, 11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산청으로 돌아갔다.
낙향한 문익점은 기울어 가는 나라의 형편, 자신의 학문을 소신껏 펼치지 못한 안타까움, 학문이 더 깊어지지 못한 일을 걱정하며 스스로를 삼우거사라고 불렀다. 1392년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조선(1392~1897)을 건국했지만, 역성혁명을 추진한 세력에 반대했던 그는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겠다며 새 왕조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연보에는 1394년 태조 이성계가 두 차례 출사를 권했으나 그가 두문불출하자 3품 벼슬과 봉록을 내렸다고 전한다. 그는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저서로 《삼우당실기》가 전한다.
백성의 옷을 바꾼 공적과 사후의 기억
문익점은 생전에 목화 보급의 공적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선에 들어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원나라에서 면화씨를 가져와 민간에 퍼뜨리고 직조 기술을 가르쳐 백성에게 큰 이익을 주었다는 이유였다. 남명 조식은 그 덕분에 일반 백성이 값싸고 질 좋은 옷을 입게 되었다며, 농사를 시작한 중국의 신농과 후직에 견줄 만하다는 뜻의 “의피생민 신농 후직씨동(衣被生民 神農 后稷氏同)”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목화의 보급으로 한국의 의생활이 획기적으로 발전했고 온 백성이 혜택을 입었다는 점이 문익점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중심이다.
조선 태종 때에는 참지의정부사 동지춘추관사 겸 예문관 대제학이 추증되고 강성군에 추봉되었으며, 그의 두 아들도 사헌부감찰로 발탁되었다. 1440년 세종 22년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로 가증되고 부민후에 추봉되었으며, 충선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산청 도천서원과 전라남도 장흥 월천사우에 제향되었고, 정조는 1785년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도천서원의 사액을 직접 지어 내려보냈다. 생전보다 사후에 국가와 학자들로부터 더욱 뚜렷한 존숭을 받은 인물인 셈이다.
그의 묘는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으며, 가까이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호인 《문익점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고향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문익점면화시배지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108호 《산청 목면시배 유지》로 지정되었고, 그곳에는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가 세워졌다. 묘소 역시 1983년 8월 24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66호 《산청문익점묘》로 지정되었다. 씨앗을 가져와 재배하고 가공해 옷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목면화기》와 여러 유적을 통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문익점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까닭은 몇 알의 씨앗을 들여온 사실 자체보다, 실패 뒤에 살아남은 한 포기의 목화에서 다시 씨앗을 얻고 재배법과 가공 기술을 백성에게 확산한 데 있다. 그는 외교 사절이자 관료였고, 정치적 탄핵과 좌천을 겪으면서도 학문과 소신을 지켰으며,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고향에서 절의를 지켰다. 무엇보다 그의 노력은 왕실이나 권문세족에게 한정되었던 솜옷과 솜이불을 일반 백성의 생활로 넓혀 한국인의 의생활을 바꾼 공적으로 평가받는다. 문익점의 생애는 한 사람의 끈질긴 재배와 기술 보급이 수많은 사람의 일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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